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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기 위하여

집착을 이해하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오늘의 조각을 놓고 편히 잠드는 삶에 대하여.

2026년 8월 27일
#life#philosophy#reflection

이 글은 자기 정의의 글이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의미 있다고 부를 것인가. 어떻게 살고 싶고, 실제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정해보려 한다.

나는 철학에 정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모른다. 여기 적힌 생각들이 철학적으로 옳거나,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맞물린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다만 내가 읽고, 겪고, 이해하고, 소화한 것들을 내 언어로 설명할 뿐이다. 이 글은 틀릴 수 있고, 앞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의 답을 적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잘 자는 삶이다.

잠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잘 잔다는 것은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했고, 하지 못한 일은 잠시 내려놓았으며, 내일 해야 할 일을 알고, 내 삶이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지는 않다고 몸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다.

잘 자고 일어나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한다. 사람을 만나고, 배우고, 만들고, 움직인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뒤 충만한 마음으로 다시 잠자리에 든다. 잘 자는 것은 좋은 하루의 시작이면서, 좋은 하루를 살았다는 결과다. 삶의 모든 선순환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삶은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하나씩 이해하고 쳐내는 삶이다.

잠을 방해하는 첫 번째 원인은, 당연하게도 육체적 결핍이다. 균형 잡힌 식사, 적절한 운동, 햇빛, 건강한 관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또 다른 원인은 정신에 있다. 바로 우울과 불안이다.

우울과 불안은 정신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정신이 무너지면 몸이 무너지고, 무너진 몸은 다시 잘 자는 삶을 방해한다. 그렇게 망가진 잠은 다시 정신을 무너뜨린다.

여기서 말하는 우울과 불안은 임상적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만을 뜻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걱정과 상상, 이미 일어난 일을 반복해서 되새기는 마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살아버리는 마음을 포함한다.

임상적인 질환에는 전문가의 도움과 약물 치료가 필요할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경우에도 몸의 질서를 되찾는 일은 중요하다. 잠을 되찾고, 햇볕을 쬐고, 건강하게 먹고, 운동하고, 사람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 역시 그 치료와 회복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지만, 생각만으로 모든 병을 없앨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고, 잘못된 생각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훈련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우울과 불안을 이겨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그것들이 우리의 모든 밤을 빼앗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우울과 불안은 왜 생기는가.

어느 날 불교가 내게 그에 대한 답을 주었다. 그중 세 가지 개념이 특히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연기는 모든 것이 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뜻이다. 삶은 무한히 많은 관계와 조건으로 얽혀 있다. 하나의 결과는 하나의 원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무상은 그 모든 조건과 관계가 끊임없이 변하며, 영원히 유지되는 상태는 없다는 뜻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나 자신도 계속해서 변한다.

무아는 나라는 존재 역시 고정되고 독립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나의 몸, 기억, 관계, 환경, 선택과 경험이 계속해서 만나고 변하며 만들어내는 존재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도 비슷한 한계를 가리킨다. 어떤 사건이 무엇의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지금의 불행이 무엇으로 이어질지, 지금의 행운이 나중에 무엇을 잃게 할지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사실을 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잊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특정한 결과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반드시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지식으로 과거의 자신을 심판하고,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결과까지 알고 있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생각하고 준비하면 미래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으면 준비가 부족했거나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다른 선택을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과를 소유할 수는 없다. 계획하고, 훈련하고, 실행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그 결과를 결정하는 조건은 우리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집착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와 크기의 집착을 안고 살아가며, 그 집착은 아주 천천히 변하거나 깎여 나간다.

불교에서는 집착은 고통을 만들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완전한 해탈을 내 삶의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 집착은 단순한 결함이 아니다. 집착은 나를 괴롭히지만, 동시에 나를 움직이게 한다. 무언가를 이루게 하고, 끝까지 이해하게 하고, 다시 일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목표는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집착을 이해하고, 돌보고, 훈련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집착은 내 안의 작은 아이와 같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울고, 두려우면 숨고, 화가 나면 모든 것을 부수려 한다. 그 아이를 죽이거나 내쫓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아이에게 내 삶을 맡길 수도 없다. 나는 그 아이를 키워야 한다.

비유하자면, 포유류의 뇌가 파충류의 뇌를 돌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정확한 신경과학적 구분이라기보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비유다. 내 안에는 즉각적으로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무언가를 차지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고, 달래고, 기다리게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부분도 있다.

집착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집착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도 사랑은 아니다. 집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되, 그것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는 더 넓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는 끝없이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린다.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지고, 그는 다시 내려가 돌을 밀어 올린다. 나에게 그 돌은 집착이다.

나는 평생 그 돌을 굴려야 할 것이다. 돌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을 굴리는 요령은 배울 수 있다. 어느 길로 밀어야 덜 다치는지, 언제 쉬어야 하는지, 어디에 힘을 주어야 하는지, 언제 혼자 밀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돌을 굴리지 않는 삶을 꿈꾸기보다, 돌을 요령껏 굴리고 밤에는 잘 자는 삶을 살고 싶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빅토르 프랑클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만을 묻지 말고,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삶의 요구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언제나 정당한 것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부당한 희생을 요구하기도 하고, 잘못된 질서에 순응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록, 세상의 요구 중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원하는 것이 선명해지면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도 선명해진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을 바라보되, 세상이 실제로 내미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테트리스를 하듯 사는 것이다.

테트리스에서는 어떤 모양의 조각이 내려올지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 필요한 조각이 바로 올 수도 있고, 가장 원하지 않는 순간에 가장 다루기 어려운 조각이 내려올 수도 있다.

이미 놓은 조각은 되돌릴 수 없다. 과거의 실수는 판 위에 남는다. 완벽한 조각만을 기다릴 수도 없다. 지금 내려오는 조각을 놓지 않으면 게임은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운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규칙을 이해할 수 있다. 판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다. 다음 조각을 보고 계획할 수 있다. 여러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다.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 반복해서 훈련하며 같은 상황에서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실력은 무작위를 없애지 않는다. 실력은 무작위 속에서도 더 오래 버티고, 더 많은 공간을 만들고,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은 조각을 내밀고, 나는 그 조각을 어디에 놓을지 책임진다. 어떤 조각이 내려오는지는 나의 잘못도, 공로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디에 놓고, 다음 조각을 위해 어떤 공간을 남길지는 내 몫이다.

테트리스에는 최종적인 완성이 없다. 줄을 지워도 새로운 조각은 계속 내려온다. 판을 완전히 비웠다고 해서 게임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삶에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마지막 순간은 없을 것이다.

목표는 완벽한 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음 조각을 놓을 공간을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는 계획이 필요하다. 하지만 계획은 미래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의 판을 더 정확히 보고, 다음 몇 개의 조각에 대응하기 위해 세우는 가설이다. 상황이 바뀌면 계획도 바뀌어야 한다.

훈련도 필요하다. 훈련은 항상 좋은 조각을 받기 위한 의식이 아니다. 나쁜 조각이 왔을 때 덜 당황하기 위한 준비다.

테트리스처럼 산다는 것은 집착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집착이 원하는 방향을 이해하고, 현재의 판을 받아들이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결과를 관찰하고, 다시 훈련하는 것이다.

집착을 이해하고 끝없이 생각하는 일은 어렵다.

『진격의 거인』에는 내가 중요하게 받아들인 태도가 나온다.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
Never give up on trying to understand.

나는 이것이 매우 큰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관찰과 이해에서 온다. 무엇이 나를 화나게 하는지,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지, 내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지, 왜 그것을 얻어야만 한다고 느끼는지를 보아야 한다.

『대학』의 팔조목도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시작한다. 사물에 이르고 앎을 완성한다는 말이다. 먼저 보고, 관찰하고, 구분하고, 이해해야 그다음의 행동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보고, 관찰하고,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틀릴 수 있다. 지금의 이해가 나중에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사람은 변하고 상황도 변한다. 그러나 이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수정해야 할 이유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해에도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변신으로 낙타, 사자, 아이를 이야기한다.

낙타는 짐을 진다. 먼저 기존의 지식과 가치, 규칙과 전통을 배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견디며 받아들인다.

사자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배운 것을 의심하고, 자신에게 명령하던 가치에 반항하며,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얻는다.

아이는 새롭게 시작한다.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규칙과 의미를 창조한다.

나는 이 비유를 좋아한다.

창조가 복종보다 더 고귀하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가 있다는 점이다. 충분히 복종해본 적이 없다면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스스로 거부해본 적이 없다면 자신의 가치를 만들 수도 없다.

이것은 공부와 일에도 적용되지만,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도 적용된다. 먼저 내가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는지 인정해야 한다. 그 집착이 만들어낸 규칙에 복종해보아야 한다. 그 규칙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고, 어디에서 망가뜨리는지 보아야 한다. 그다음 잘못된 명령에는 반항하고, 마침내 집착과 함께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

내게 있어서 가장 큰 집착은 이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승부욕이다.

이기고 싶고, 끝까지 해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무엇인가에 패배했거나,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동안은 이런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초연해야 하고, 비교하지 않아야 하며, 승패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평생 나와 함께할 집착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이 집착을 없애기 위해 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집착에 모든 것을 맡기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그것을 이해하고, 지키고, 키우고, 훈련하며 살아갈 것이다.

승부에 대한 울분이 나에게 방향을 주게 하되, 한 번의 승패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기 위한 힘으로 사용하되, 그 힘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삶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집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 또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는 기독교를 잠시 들여다보자.

나는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는다.

나에게 신은 테트리스에서 무작위로 테트로미노를 내려보내는 시스템과 같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을 내미는 전체다. 사회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기도 하며, 인류와 자연이기도 하다. 우연과 역사, 유전과 환경, 그리고 지금까지 내려진 수많은 선택의 집합이기도 하다.

나 자신도 그 전체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신이 항상 선하거나 공정한 조각만을 내린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은 때때로 잔인하고 부당하다. 다루기 어려운 조각이 연이어 내려올 수 있고, 이미 망가진 판 위에 또 다른 문제가 떨어질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신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러나 어떤 조각이 내려왔다는 사실 자체는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거나,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이 조각이 내려왔고, 지금 이 판 위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기독교의 많은 가르침에는 동의한다.

예수는 세상을 품고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나는 아직 세상 전체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만 보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지 않는다. 나의 집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되, 세상이 실제로 내미는 것들을 관찰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은 징조를 관찰하며 자신의 길을 따라간다. 나 역시 세상이 내게 보여주는 선택지를 유심히 보고 싶다. 모든 우연에 신비한 뜻이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 내 계획과 다른 조각을 내밀었을 때, 그것을 단순한 방해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고 싶다.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도 느끼겠지만, 이 모든 일은 쉽게 되지 않는다.

집착을 관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체념보다 어렵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실패한 뒤 다시 훈련하는 일도 쉽지 않다.

완성되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시지프의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이고, 테트리스의 조각은 계속 내려올 것이다. 나는 또다시 집착하고, 후회하고, 걱정할 것이다. 어떤 밤에는 잠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을 조금 더 능숙하게 굴리고, 조각을 조금 더 침착하게 놓을 수는 있다.

그리고 이전보다 편히 잠드는 밤이 많아진다면, 나는 조금씩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생각과 비유를 나열했지만, 실제 삶의 한가운데에서 이 모든 것을 떠올릴 수는 없다. 판단해야 하는 순간마다 불교와 프랑클과 카뮈와 니체를 하나씩 꺼내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한 문장만 남긴다.

Festina lente.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즐겨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천천히 서둘러라.

성급하게 조각을 놓지는 말라. 그러나 완벽한 조각을 기다리며 멈춰 있지도 말라.

판을 보라.
집착을 이해하라.
내려온 조각을 받아들여라.
가능한 수를 계획하라.
결정하고 실행하라.
결과를 관찰하고 다시 훈련하라.

어디로 가는지 보면서 발을 내디뎌라. 서두르되 흔들리지 말고, 신중하되 멈추지 말라.

그리고 오늘 놓아야 할 조각을 놓았다면, 나머지는 내일의 몫으로 남겨두고 잠들어라.